벌초를 다녀와서 (1)


내 고향은 강원도 원주다.
원주에서도 내가 태어난곳은 흥업이라고 하는 시골 동네인데
지금은 한라대학교가 생겨서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대학 근방의 거의 모든 집들이 대학부지를 내어주고
그 돈으로 학생들에게 방을 대여해주기위해
새로 집을 지었지만 우리 작은집은 예전과 크게 변한게 없다.
장작을 때는 아궁이와 큰 가마솥이 차지하고 있던 부엌이
입식 주방으로 바뀌고 방이 한개 더 생겼을뿐이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내 기억은 원주에서 부터 시작되어서
시골생활의 기억은 없다.
다만 어릴적 작은집에 놀러가면 안방엔 화롯불이란게 있어서
감자나 고무마등을 구어 먹을 수 있었고
밥을 먹을때면 큰 그릇에 밥을 많이 담아 가족들이 모여앉아
모두 같은 그릇에서 밥을 퍼 먹고 찬은 거의 직접 캐온 나물이나
근처 텃밭에서 내온것들 뿐이었다.
방에 있으면 마을사람들은 자기집 들어오듯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제끼고 불쑥불쑥 들어오곤 했는데
사실 마을 사람들이 다들 가족이나 다름 없었을것이다.

마을 중간쯤에 우물이 있어서 그 우물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했고
큰 저수지도 있어서 겨울엔 외발스케이트를 탔고
여름엔 낚시를 했다.
겨울산에선 비료포대로 눈썰매를 탔고
여름엔 토끼밥을 구하러 다녔다.
초등학교 방학때 작은집에서 지내던 그때가 가끔 그립다.
그때 정말 그곳은 시골 이었다.

벌초를 할 때 모두들 낫 하나씩 들고 하루 왠종일 걸려서 하던것을
지금은 예초기라고 하는 기계로 단 몇시간만에 일을 마친다
그리곤 별 이야기도 없이 밥을 먹곤 모두들 제 생활로 돌아간다.

예전의 시골마을을 그리워하는것이 목가적낭만주의에
빠진 한순간의 책임없는 잡념일지라도 지난날을 그리워 할 수 있는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2002. 09. 09  민병규



내 고향은 강원도 원주다.
원주에서도 내가 태어난곳은 흥업이라고 하는 시골 동네인데
지금은 한라대학교가 생겨서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대학 근방의 거의 모든 집들이 대학부지를 내어주고
그 돈으로 학생들에게 방을 대여해주기위해
새로 집을 지었지만 우리 작은집은 예전과 크게 변한게 없다.
장작을 때는 아궁이와 큰 가마솥이 차지하고 있던 부엌이
입식 주방으로 바뀌고 방이 한개 더 생겼을뿐이다.

내가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내 기억은 원주에서 부터 시작되어서
시골생활의 기억은 없다.
다만 어릴적 작은집에 놀러가면 안방엔 화롯불이란게 있어서
감자나 고무마등을 구어 먹을 수 있었고
밥을 먹을때면 큰 그릇에 밥을 많이 담아 가족들이 모여앉아
모두 같은 그릇에서 밥을 퍼 먹고 찬은 거의 직접 캐온 나물이나
근처 텃밭에서 내온것들 뿐이었다.
방에 있으면 마을사람들은 자기집 들어오듯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제끼고 불쑥불쑥 들어오곤 했는데
사실 마을 사람들이 다들 가족이나 다름 없었을것이다.

마을 중간쯤에 우물이 있어서 그 우물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했고
큰 저수지도 있어서 겨울엔 외발스케이트를 탔고
여름엔 낚시를 했다.
겨울산에선 비루포대로 눈썰매를 탔고
여름엔 토끼밥을 구하러 다녔다.
초등학교 방학때 작은집에서 지내던 그때가 가끔 그립다.
그때 정말 그곳은 시골 이었다.

벌초를 할때도 모두들 낫 하나씩 들고 하루 왠종일 걸려서 하던것을
지금은 예초기라고 하는 기계로 단 몇시간만에 일을 마친다
그리곤 별 이야기도 없이 밥을 먹곤 모두들 제 생활로 돌아간다.

예전의 시골마을을 그리워하는것이 목가적낭만주의에
빠진 한순간의 책임없는 잡념일지라도 지난날을 그리워 할 수 있는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hampi 민병규

인도-네팔 국경을 넘은 것은 저녁 무렵 해가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을 때였다.
지금까지 다녀 본 동남아시아나 중,서아시아 국경마을은 하나같이 분위기가 비슷하다.
뭔가 어수선하기도 하고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술렁술렁한 분위기에다 꽤 열악한 환경.
어쨋거나  네팔의 포카라나 카트만두로 들어가는 버스가 없어 할 수 없이 하룻밤 자야 한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숙소의 골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버스가 없다고 한다.
5일간 스트라이크를 한다고 하니 최대 5일간 버스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숙소에서 마냥 버스를 기다리는 꼴이 되었다. 달리 뭔가 할 꺼리가 국경마을에는 없다.
네팔 국왕이 살해되고 난 다음부터 네팔의 분위기가 좀 험악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평화스럽기만 한 네팔이었는데 변해버릴까 걱정이다.

끝내 버스가 오지 않는다면 다시 인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을텐데
그러면 시간과 돈 모두가 그냥 날아가 버리는 셈이다.
이런 열악한 곳에서 단지 하룻밤 자기 위해 열 시간을 넘게 달려와 비자요금을 30달러를 낸 꼴이 돼버리는 것이다.
빨리 스트라이크가 끝나길 바라지만 현재로선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일단 숙소주인에게 버스티켓 문제를 확실히 얘기한 다음 내일은 어떻하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여행하는 동안엔 빨리 포기하고 대안을 찾거나 그냥 체념해 버리고 운명의 손에 자신을 던져버려야 할 때가 가끔 있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2시간 정도 허망하게 있는데 갑자기 버스2대가 숙소 앞에 서더니 포카라, 카트만두를 외친다.
정신 없이 서둘러 짐을 챙기고 포카라행 버스에 올랐다.
08시에 출발 했어야하나 10시30분쯤 출발이다.
좀 늦었지만 버스 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총을 든 군인들을 여럿 볼 수 있는 몇몇 제법 큰 마을을 지나쳤는데
거의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 같다.
포카라, 카트만두행 버스가 쉬어가는 무글링에는 예전처럼 네팔 전통 악기인 ‘사랑기’를 파는 아이들도, 군것질 꺼리를 파는 노점상도 없었다. 휑한 바람만 불 뿐이다.
저쪽에서 서부의 총잡이 둘이 결투를 위해 서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상점들과 식당들도 문을 닫았다.
문이 반쯤 열린 식당에선 낮잠을 자던 주인아줌마가 부시시 일어나 주변을 살피곤 하였다.

다행이 문이 열린 식당을 찾아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차갑게 식은 달밧을 먹는 동안
아까부터 간간히 뿌리던 비가 제법 굵어졌고 날도 어두워졌다.
무글링마을은 더욱 스산해져서 버려진 유령의 마을처럼 변했다.
출발시간이 되어 버스에 올랐을때 비가 더욱 세차지더니
나중엔 버스지붕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만보자니 하늘에서 엄지손가락 반만한 얼음이 떨어지는게 아닌가!
한국에서 몇 번 우박을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큰 얼음 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살다보면 몇 번쯤 ‘하늘이 미쳐 버린 것 같은 날’을 만날 때가 있다.
정말 굵은 빗줄기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 내릴때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지구를 흔들어 놓는듯한 천둥번개 소리가 가슴을 마구 요동치게 할 때 말이다.
이럴 때는 곧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땅이 뒤집히고 물이 넘쳐 흐를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시작이 갑작스러우면 끝도 갑작스럽기 마련이다.
갑작스레 우박이 내리고,
갑작스레 햇빛이 반짝이는 것이다.
이런 시치미는 본 일이 없다.

한껏 물을 머금은 산이 햇빛을 받아 더욱 푸르고 싱그럽게 반짝인다.
끝나지 않을것 같은 길을 달리고 달려 마침내 저녁 6시쯤 포카라에 도착했다.
히말라야의 설산도 그대로, 평화로운 호수도 그대로, 호수 주변의 숙소들도 그대로,
포카라는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평화다.
Shanti Shanti~~~

2002/04/02 hampi. 민병규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인도의 버스>

  인도의 버스들은 대게 창문에 유리창이 제대로 붙어 있지 않다.
비가 오면 커텐을 치거나 셔터같이 생긴것을 내리고 보통때엔 항상 OPEN된 상태로다.
그 버스가 달릴때면 쉴새없이 크락션을 울려대며 비포장 도로보다 나을것이 없는 포장도로를 거침없이 달려댄다.
또 쇼바는 어찌그리 딱딱한지 화물차뒤에 타고 있는것 같이 생각된다.
  버스의 엔진은 할 수 있는한 죽을힘을 다 해 버스를 움직이고 있는것같다.
어느 엔진보다도 정말 열심히 일하는 엔진이라는 생각이 드는것이다.
거기다가 운전사는 인도노래까지 틀어놓는다.
엔진소리와 크락션소리만해도 귀가 멍멍할 지경인데 거기다가 음악까지 틀어놓으니 거의 버스안은 소음의 한가운데에 놓여진, 쿵쾅대는 깡통과도 같이 된다.
  그렇다고 마주오는 버스라고 가만히 지나가는것이 아니다.
서로 있는대로 갖가지 종류의 크락션을 울려대며 지나치고 또 추월해가는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혼돈의 질주다.
검은연기를 내뿜으며 있는힘을 다하는 엔진소리와 고음의 인도노래소리, 거기다 크락션까지 꽥꽥대며 달리는 혼돈의 질주!!!
그리하여도 어찌됐든 버스는 목적지 까지 잘 데려다 준다.
한국에서 창문이 꼭꼭닫힌 버스를 타면 좀 답답한 느낌이 들어 인도의 버스가 가끔 그리워 진다.
그 혼돈의 질주... 그것이 그립다.

2001.12.19.

hampi 민병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캘커타에서 큰 형님과 함께 짜이장사를 하는 꼬마>


하루를 시작하는 인도인들.....
캘커타......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길거리 처마밑의 도미토리.
한적한 찻길,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는 짜이가게,
길가의 펌프에서 샤워하는 사람들,
아침 신문을 받아들고 씩씩하게 걸으며 장사를 시작하는 신문팔이 할아버지.

새벽이면 길에서 자고 있던 인도인들이 주섬주섬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어느곳이나 짜이장사가 있어서 자연스레 짜이가게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게 되어 아침 신문을 펴들고 국제정세나 정치, 일상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하면서 짜이한잔과 함께 아침을 시작한다.
  돈이 없는 노인네들도 주위에 어물쩡 자리를 잡으면 짜이장사는 말없이 짜이한잔 건네주고 또 그 노인은 동병상련인 노이네를 불러선 사이좋게 나눠마시는것을 보면 Shanti~~ 마음이 흐뭇해 진다.
세상의 모든 평화와 기쁨과 행복이 짜이 한잔속에~~

2001.12.19.

hampi 민병규



예전 군대에 갔을때 1군수지원사령부에 자대배치를 받고 원주에 1주일정도 대기하고 있었다.
훈련 받는 몇달동안 듣지 못하던 도시의 소리, -원주가 그렇다고 큰도시는 아니지만-
도시가 깨어나는 소리가 아침에 들렸을때 얼마나 그 소리가 반가운지
그동안 뭔가 문명인으로써 살지 못하고 시골에서 썩는듯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낯선 군인의 모습으로..
그래서 그런 도시의 소리가 그리 문명스럽지 못했던 몇달간의 훈련생활에서의 탈출구 같기도 했을것이다.
그렇지만 1주일 후 난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시골스런 풍경이 있는 그런곳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작은 언덕에 올라서기만해도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과연 이런것이구나 하는것을 느낄 수 있는곳이다.
야간에 근무를 나가면 선명한 은하수가 눈 부시던 그런곳이었다.

지금 나는 서울의 중심.
그곳에서 아주 조금 떨어진곳에 누워있다.
도시의 소리. 도시의 웅웅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그런곳이다.
예전의 그 그리워했던, 그렇게 반가워했던 도시의 소리.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소리가 조금도 반갑거나 듣고 싶은 소리가 아니다.
다만 피곤의 일상, 일상의 피곤함이 묻어나는 그런 소리일뿐이다.

언젠가 문득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깨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 웃으며 눈을 뜨고 그 어느날보다 상큼하고 싱그러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것이 그 결코 상쾌하지만은 않은 캘커타의 까마귀 소리라 할지라도....
얼마전 인도 캘커타에서 알람소리와도 같은 까마귀 소리에 잠을 깨어 아침을 맞이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사실 난 기분이 좋았다.
싸이렌 울려대는 소리, 수많은 차들의 운행소리, 빌딩과 지하에서 뭔가를 운전하며 내는 웅웅소리 보다는 알람과도 같은 그 까마귀들의  까아악까악 소리가 훨씬 더 듣기에 좋다.
물론 시골에서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더 좋은건 말할 나위없다.
산골짜기 시골에서 살게된다면 다시 또 이런 도시의 소음들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쨋든 지금은 캘커타의 그 알람소리같은 까마귀 울음소리가 다시금 그리워진다.

2001. 6. 2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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